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메이너드 케인스 (문단 편집) == 여담 == * 농반진반으로 그의 이론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고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공산주의]]가 몰락했으니,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태어나면서 그의 꿈을 좌절시킨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의 대부분을 '수정 가능한 문제'로 만들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궁극적인 주장인 '자본주의는 망한다'의 반례가 되었다. 다만 마르크스의 이론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되새겨볼 부분은 있다보니, 그의 역사, 철학, 경제학에 관한 주장들은 아직도 제법 회상되고 있는 편이다. 게다가 결국은 마르크스가 있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르는 이들이 많다보니 자본주의에서도 더는 기존의 길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진짜 무대뽀로 고집스럽게 나가려다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테니까.] * 특이한 입술 모양 때문인지 별명이 '[[오리]] 주둥이'였다. * 성적인 성향이 [[양성애자]]였다. * 거의 모든 걸 병적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유년기에는 [[계단]]의 숫자를 센다거나, 먹은 음식의 개수를 세는 것은 물론 20대 몇 년 동안에는 '''[[섹스]]를 한 횟수를 모두 기록'''해두기도 했다고 한다. * 경제학에 막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 지도 몰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막 저술하기 시작할 무렵 친구에게 보낸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라는 글의 편지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일 것이다. *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1017464-00C68F9F00000578-652_233x423.jpg]]|| ||케인스 부부--발랄하다--|| 연하의 발레리나(리디아 로포코바)와 42살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아내가 [[불임]]이었기에 자녀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내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무용수였다. 그녀는 케인스가 죽고 나서 재혼을 하지 않고 30년 넘게 더 살았다. 여담으로 케인즈의 키는 198cm였는데, 사진을 보면 부인도 장신인 것을 알 수 있다. * 남동생인 조프리 케인스는 의사이자 작가였고, 작위를 받을 정도로 대성했다.[* 군의관으로도 활약해서 1, 2차 세계대전에 다 참전했다. 최종 계급은 공군 소장.] 이 사람은 [[찰스 다윈]]의 손녀와 결혼해서 자녀를 꽤 많이 뒀기에, 영국에 있는 케인스 가문의 사람들은 다 이 사람의 자손이다. 조프리 케인스의 3남이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조카인 마일로 케인스가 큰어머니인 리디아의 도움을 받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기를 작성했다. 또한 [[나니아 연대기 실사영화 시리즈]]에 [[나니아 연대기/등장인물#s-1|페벤시가 4남매]]의 셋째 [[에드먼드 페벤시]] 역을 맡은 [[스캔다 케인즈]] 역시 동생의 자손이다. * 20세기 초반 영향력 있는 영국의 지식인, 예술인 모임인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으로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일종의 덕후였다. 그는 이러한 문화예술적 행위가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면은 레닌 등에게 그가 부르주아적 경제학자라고 평가받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이 10월 혁명 이후 케인스의 저작을 읽었고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다만 그의 경제적 이론보다는 케인스가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한 것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 [[주식]] 투자에 크게 성공한 인물로도 나름 유명하다.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도 120%의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식투자에서 대박치는 경제학자는 드물다. 케인즈의 앞 세대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를 예로 들면, 1920년대에 경제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주식 시장의 큰손이 되었지만 매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예측만 했다가 결국 본인의 재산은 물론 학문적 명성마저 날려먹고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대표적으로 '''“주식시장은 앞으로 꺼지지 않는 영원한 고점에 도달했습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대공황]]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그의 발언이 있고 얼마 가지 않아 [[1929년 월가 대폭락|검은 목요일]]이 다가왔고, 피셔의 위 발언은 주식 시장의 역사에서 가장 조롱을 많이 받은 말이 되었다.][* 한편 마르크스는 죽기 1년 전쯤에 엥겔스가 요양 여행가라고 보내준 돈으로, 자신의 경제적 감각이 어떤지 한 번 시험해보려고 미국 북부 철도회사와 철강회사 주식에 투자하여 2주 만에 4000파운드를 벌어들인 적이 있다. 이때가 1880년대였으니, 4000파운드를 지금 한국 돈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4억 6800만원으로 상당한 거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 주식투자에 어떻게 성공했냐는 질문에 '''"중간의 중간을 택하세요."'''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참고로 케인스는 상류층이였지만 상속받은 재산은 딱히 없다고 한다.) 현대의 주식투자가들에게 유명한 그의 투자이론은 1936년 발간된 출간된 그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2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주식투자는 미인선발대회와 같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투표로 미인을 뽑는 미인선발대회에서 선발되는 미인은 투표자 자신이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투표자들도 동시에 그러한 기준으로 투표를 한다면 이것은 아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투표자들이 그 자신외의 또다른 투표자들이 미인이라 생각할 여인으로 예측되는 여인을 찍어야 한다. 그리하여 Everything depends on everything else.] 그래서 대체로 투표자의 평균 선호에 가장 가까운 여인이 미인으로 최종 선발되게 된다. 결국 이는 투자자 개인이 생각하기에 이익을 낼 것 같은 종목이 아니라 시장 주도주나 인기주에 투자하라는 말과 같다. 여담으로 이 미인 선발대회의 비유는 2013년 수능특강 영어B에 지문으로 제시되었다. 관련된 뒷얘기로, 사실 케인즈의 주식 투자 성공은 미인대회 이론 [[그런 거 없다|그런 거 없고]] 그냥 아내가 찍어주는 종목을 투자했는데 운 좋게 대박이 났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이 소문은 주식 투자를 위한 각종 분석 및 연구가 별로 소용없다는 주장의 예시로 자주 쓰인다. *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주장을 [[Rap|랩]]으로 요약한 동영상도 존재한다. 나무위키에는 [[세기의 대결 - 케인즈 vs 하이에크]]라는 이름으로 항목이 등록되어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Cc5n2xg7tK4|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FXezfpt0Kbg|보기2]] 참고로 해당 동영상의 각본은 조지 메이슨 대학의 러셀 로버츠(Russell Roberts) 교수가 집필했는데, 이 교수는 친하이에크 성향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케인즈의 주장이 하이에크에 반박받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사실 둘은 사상적으론 대립했지만 사적으론 친한 사이였는데, 하이에크는 케인스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 저는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비참했을 거에요."(Keynes Hayek: 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s, By Nicholas Wapshott, 206쪽)라고 평하기도 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실제로 만난 일이 있었다. 다만 당시만 해도 둘은 접점이 크지 않았던지라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와 경제부흥의 상징과도 같은 두 거물의 만남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케인스는 '''"미국 대통령이면 경제를 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라고 회고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그는 경제학자라기보단 수학자 같았다."'''라고 평했다. 허나 이후엔 케인스가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가 한때 길렀던 [[개]]의 이름이 케인스였다. --스트레스 해소용?-- --쇼펜하우어 : ???-- * 경제학자로서의 업적만 부각되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케인즈는 [[아이작 뉴턴]] 재조명의 선두주자기도 했다. 그는 경매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미출간 저작을 구매하여 읽을 정도로 뉴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검토한 끝에 케인스는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법사,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 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이라는 말로 뉴턴을 평가했다. 실제로 뉴턴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연금술과 신학 연구에 물리학 이상의 노력을 투입했다. 다시 말해 20세기에 재평가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연금술사, 신비주의자로서의 뉴턴의 이미지는 바로 케인스가 구축해놓은 것이다. 이 때문인지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에서는 경제학자라는 이야기는 일절 없이 '전기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과학사나 수학사 관련 서적에서 뉴턴을 "최후의 마법사"로 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바로 케인스의 영향 때문이다. * 대체역사 게임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1차대전 패배 후 공산화 된 영국의 듣보잡 경제학자가 되었다. 동맹국이 1차대전에서 패배함에 따라 현실에서의 케인즈 주의의 위상을 이 세계관에서는 [[얄마르 샤흐트]]의 사상이 차지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